오천군자리
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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오천군자리(烏川君子里)
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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인간과 자연이 한 울타리 하고 역사 전통이 고동치는 마을

안동에서 북쪽으로 도산서원 가는 국도를 따라 약 20km 정도 가다 보면 오른쪽 길가에 ‘안동군자마을’라는 안내판과 자연석에 ‘군자마을’이라고 새긴 표석이 연이어 서 있고, 여기서 오른 쪽으로 300m 정도 들어가면 20여 채의 고가들이 들어앉은 안배된 유적지에 다다른다. 자동차로는 안동시청에서 출발한다면 약 20분 정도 걸리는 거리에 있다.

이곳이 조선조 초기부터 광산김씨 밀직부사공파가 20여 대에 걸쳐 600여 년 동안 세거해 온 외내(오천)에 있었던 건축물 중 문화재로 지정된 것과 그 밖의 고가들을 1974년 안동댐 조성에 따른 수몰을 피해 새로 옮겨 놓은 곳이다.
물이 맑을 때 물밑에 깔린 돌을 멀리서 보면 검게 보인다고 하여 ‘오천’이라 하는데, ‘까미귀 오’자를 이두식으로 읽으면 ‘외’자와 통한다고 한다.

군자리 전경 사진

군자리의 유래는 ‘오천 칠군자(烏川七君子)’로 유래한다. 산남 김부인(1512년~1584년), 후조당 김부필(1516년~1577년), 양정당 김부신(1523년~1566년), 읍청정 김부의(1525년~1582년), 설월당 김부륜(1531년~1598년), 일휴당 금응협(1526년~1589년), 면진재 금응훈(1540년~1616년) 이들은 모두 예안 오천 출신으로 김효로의 친손이나 외손들이었는데, ‘군자리’라는 마을 이름도 이들에게서 유래한 것이다.
한강(寒岡) 정구(鄭逑)가 안동부사로 재임시에 오천 마을을 방문한 다음 “한 집안 식구로서도 다 착하기 어려운 법인데 오천 마을은 주민들 모두가 군자(君子) 아닌 사람이 없구나”하고 감탄하였다고 하여, 그 이후부터 오천을 ‘군자리(君子里)’라고 일컫게 되었다 한다.

세칭 우리말로 ‘외내’라 불려온 역사와 전통이 고동치던 마을은 광산김씨 밀직부사공파의 세거지로서, 예전에는 이곳에서 1.5km 정도 아래에 있었다. 영남 땅 북쪽 낙동강 유역에 역사의 고장 안동이 있고, 지금은 안동의 한 지역에 불과하지만 옛적에는 독립된 현이었던 해동 유학의 근거지 예안이 있었다. 옛날 예안현은 넓이가 동서가 불과 60리, 남북이 30리 정도로 조그마한 현이었으나, 그 풍광은 매우 뛰어났던 것 같다.

군자리 전경 사진

이곳에는 ‘구곡’이라는 아름다운 명칭이 있어 왔다. 박석, 월명, 백운, 단사, 토계, 분천, 월천, 비암, 오천 등 아홉 군데가 바로 그것이다.
옛사람들이 일컬은 것이 이와 같으니 어찌 하늘과 땅 사이에 별천지가 아니겠는가.
오천으로부터 상류로 거슬러 올라 한 걸음 한 걸음 빼어난 경치를 찾아본다면 굽이굽이 마을마다 기이한 형상들이 곳곳마다 달라 유람하는 흥미가 구곡에 이르도록 스스로 그만둘 수 없게 된다. 만약 주회암선생으로 하여금 예안 고을의 구곡을 볼 수 있게 하였다면 이곳을 ‘무이구곡’과도 그 우열을 가늠할 수 없었을 것이다.